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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9-03-20 01:03 (수)
3화 미륵산 봄 여신 : 바람난 여인, 얼레지
3화 미륵산 봄 여신 : 바람난 여인, 얼레지
  • 미디어스 통영
  • 승인 2019.0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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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시작, 이른 봄 등 이런 단어들이 물갈이할 쯤 나타나는 풀꽃이 있다. 봄이 완숙미를 품은 '얼레지'다. 작년에 3월 둘째 주쯤 만개한 얼레지를 만났는데 올해는 조우가 빠를 듯하다.
 
얼레지의 안쪽에는 흑자색 W자형 무늬가 선명하게 있다. 비단(非但), 이 야생화의 독특함은 무늬에서 끝나지 않는다. 씨방의 독특함을 견주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래로 향한 씨방은 시기를 놓치면 쏟아지고 없다. 톡하고 건드리면 사라져 버리는 봉숭아와 사뭇 비슷하다.
 
우리나라와 일본, 만주, 사할린에 분포하며 얼레지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하다. 모양새로 이름을 가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잎의 양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주름이 약간 잡힌 독특한 모양이다. 덧붙여 설명하면 꽃잎이 뒤로 젖혀진 모습이 마치 개의 이빨을 닮았다. 여하튼 그 생김새 탓에 '개의 이빨(Dog Tooth)'이란 별칭이 있다. 이 꽃의 영어명도 도그스투스바이올렛(dog's tooth violet)이다.

그리스어로 얼레지는 '붉은색'을 의미하는 에리스로니움(Erythronium)이라 불린다. 꽃잎의 흑자색 얼룩무늬와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얼레지라는 식물명에서 혹시나 '외래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우리나라의 토종 꽃이다.
 
철원 지방에서는 산모가 몸조리할 때, 미역국 대신에 얼레지 잎을 끓여 먹었다는 말도 있다. 얼레지는 종자 발아 시기가 되면 뿌리가 흙 가까이 있다가 땅속 깊이 내려간다. 이 뿌리는 훌륭한 녹말을 제공해 줘 일본에서는 얼레지 녹말을 카타쿠리(片栗)라 한다.
 
얼레지를 만나고자 용화사 위로 난 임도를 따라 오르다 작은 개울길로 접어들었다. 이 작은 오솔길은 물이 마른 계곡과 연결돼 있다. 길을 따라 야생화들이 고개를 들고 인사한다.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이 조금만 들어가면 이름 모를 꽃 무리가 펼쳐진다. 얼레지는 계곡을 따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미륵산에서 만난 얼레지의 아름다움에 새삼 빠졌다. 세상에서 가장 헷갈리는 게 '꽃 이름'인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꽃이 있는지, 같은 꽃도 여러 종에 그 이름도 다양하다. 처음 꽃 이름을 들으면 알 것 같다가 금방 잊어버리기가 일쑤다.

헷갈리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이름을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하니, 이 많은 야생화 이름은 누가 지은 것인지, 아무튼 들꽃의 이름이 하도 많아 사람들은 '이름 모를 꽃'이라 묶어 말하는가 보다.
 
봄비에 촉촉이 젖은 낙엽 사이로 야생화들이 활짝 웃고 있다. 빗방울이 살짝 잎과 꽃잎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 새초롬하다. 사진을 찍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야생화의 이름을 불러 보기로 했다. 더 이상 이들에게 이름 모를 꽃이라는 수식어는 민망스러울 뿐이다. 개나리, 벚꽃, 제비꽃만이 봄꽃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야생화는 새로운 꽃의 세계로 안내했다.
 
얼레지가 산등성이까지 화사함을 뽐내고 있다. 흠씬 젖은 채 골짜기를 채우고 있다. 그 사이로 벌들이 화분을 양다리에 메고 윙윙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소리조차 좋다. 사진을 찍기 위해 고개를 너무 오래 숙여서 그런지 등이 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좋았다. 낙엽 사이로 살포시 올라온 얼레지를 프레임에 넣고자 사각사각 낙엽을 밟았다.
 
김선우 시인 작품 중에 '얼레지'라는 시가 있다. 19금 시로, 여성의 자족적 에로티시즘을 시로 호소하고 있다. 즉 얼레지를 여성의 육체로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다. 시인에 의해 텍스트로 표현된 얼레지는 뇌쇄적이고 육감적이다.

얼레지 꽃말이 '바람난 여인'이다. 이 꽃말이 시의 모태가 된다. 혹독했던 겨울을 이기고 거친 흙 틈에서 피어난 강인한 생명력의 얼레지는 본능적이며 아름답다. 모성에서 자아의 성으로 깨어나는 여성성의 과정을 시인은 얼레지를 통해 인용하고 있다.

얼레지를 보는 순간 뇌쇄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지만 바람난 여성처럼 가볍게 보이진 않았다. 이 풀꽃을 통해 자연이 만들어낸 무한한 격정에 휘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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